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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표면과 이면

황인

빛의 표면과 이면
이은선 <Where, 여기>

황인 미술평론가


이은선의 이번 전시 <Where, 여기>를 관통하는 개념의 하나로 리미낼리티(liminality)를 들 수 있다. 리미낼리티는 리멘(문턱)이 그 어원이다. 여기서는 문턱은 이쪽에서 전혀 다른 국면의 저쪽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지점을 의미한다. 이은선은 공간과 장소, 동작과 정지, 상수(常數 constant)와 변수(變數 variable), 중력과 무중력, 접촉과 비접촉 사이에 놓인 보일락 말락 하는 좁다란 경계의 문턱을 섬세한 통찰력으로 찾아내어 이를 조형적으로 제시하려 한다. 

이를 위해 갤러리 공간을 전체집합으로서의 작품으로 상정하고 그 안에 부분집합인 이은선의 작품을 배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갤러리 공간은 작가가 임의로 변경할 수 없는 상수로 주어진 공간이다. 여기에 언제든 변형 가능한 변수로서의 작품을 설치한다. 



전시전경 ⓒsiwoolee

전시를 대표하는 작품은 바닥에 놓여진 LED 아트 플렉스 설치물이다. 이 설치물은 갤러리 벽면의 길이와 똑같은 길이의 LED 아트 플렉스를 각도만 변형시켜 임의의 기하학적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갤러리의 벽면은 설계도에서 출발한다. 설계도는 ‘공간’에서 성립한다. 벽은 ‘장소’ 위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이은선의 LED 설치작업은 벽이라는 장소에 종속한 ‘사건’으로 성립한다. 공간, 장소, 사건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작가는 갤러리의 공간과 장소 및 작품이라는 종속적 장소, 이들 사이의 함수방정식을 구축했다.

함수방정식으로 치환될 수 있는 사물과 사태의 양태는 미분의 대상이 된다. 사물과 사태는 언제나 변수의 양태를 취한다. 변수의 양태를 미분하여 질서정연한 상수의 양태를 획득하는 게 미분방정식의 본령이다. 이 경우 갤러리라는 장소, 전시라는 장소성에서 벌어질 수 있는 변화무쌍한 여러 양상들 예컨대, 시간성, 사건성 등을 미분하다 보면 상수로 정지된 공간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가 있다. 조형에 있어 ‘장소의 미분’, 이런 시도가 가능하다면 그건 당연히 이은선의 몫이다.

이은선이 LED 아트 플렉스로 제시한 빛의 직선에는 구체적인 빛으로 드러난 ‘물성의 직선’과 어둠 속에 묻힌 채 침묵하고 있는 기하학적 세계의 ‘개념의 직선’이 함께 하고 있다. 

빛은 너무나 가볍고 희박한 존재다. 최소한의 질량조차 없다. 빛은 존재의 물성을 깨워 현상(現象)으로 드러내게 하는 힘이기도 하고, 희박하기는 하나 그 자체가 하나의 물성을 가진 존재형태이기도 하다. 이은선은 사방으로 퍼지려는 빛을 직선의 형태로 가두어 발광체인 빛 자체의 물성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빛의 직진성을 담보하려 한다.

기하학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직선이다. 삼각형, 사각형은 물론 심지어 원도 직선의 총합으로 수렴된다. 물론 기하학에 동원되는 직선은 우리의 시각이 포착하는 물성을 가진 직선이 아닌 개념으로서의 직선이다. 물성이 직선이 물성을 탈각하고 개념을 가지려면 질량과 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질량과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 속의 선을 찾으라 한다면 그건 빛의 직선이 될 것이다. 빛으로 빚어낸 직선이 그 무엇보다도 기하학적 개념의 직선에 더 가까워 보인다.

기하학은 구체적인 땅(이집트)에서 출발하여 개념의 공간(그리스)에서 완성된 것이니 결국은 공간의 수학이다. 공간이 장소(땅)을 지배하는 것이 기하학의 원리다. 이은선의 과거 작업 중에 땅따먹기 게임이 있었다. 이는 땅의 도메인을 확보하는 게임이다. 땅의 도메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기하학이 필요하다. 공간의 기하학이 수학자의 몫이라면 전시, 전시장과 같은 땅의 기하학은 예술가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간의 기하학을 땅의 기하학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강구하거나, 공간과 장소를 관통하는 조형적 사유를 추구해야 한다. 

  

전시전경 ⓒsiwoolee

LED 아트 플렉스를 기저로 삼고 그 위에 여러 짐볼, 맛사지볼, 훌라후프, 배드민턴 셔틀콕 등 여러 오브제를 설치했다. 이들은 운동과 관련된 용품들이다. 배드민턴 셔틀콕은 빠른 속도감을, 짐볼은 신체의 힘과 오브제의 반발력에 따르는 접촉의 감각을, 훌라후프는 원심력과 신체의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원래의 운동 에너지가 소거되었거나 중력에 굴복한 형태로 변형되어 극단적인 정지상태의 양상을 보여준다. 

운동이란 장소적인 상황이다. 질서정연한 정지상태는 장소성이 희박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공간적인 상황은 아니다. 장소와 공간, 이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어정쩡하게 하게 존재하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리미낼리티의 상황인 것이다. 

이은선의 작품 중에 ‘페이퍼 블러썸’이 있다. 종이를 살짝 구긴 작품이다. 구겨지기 전의 종이는 평면으로 봐도 좋다. 평면은 공간적 개념이다. 그러나 살짝만 구겼을 뿐인데도 평면이었던 종이는 표면으로 바뀌어버린다. 표면이 발생하는 순간 이면도 동시에 발생하며, 표면과 이면은 그 사이에 사건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장소성의 깊이를 가지게 된다. 약간의 구김으로 인해 공간은 장소로 변모했다. 이때 종이에 생긴 미세한 주름의 전후에 놓인 어떤 순간이 리미낼러티에 해당한다. 그 순간은 찰나적이며 현상적인 변화는 미세하나 본질적인 국면은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공간과 장소는 개념과 실재처럼 서로가 완전히 분리된 전혀 다른 세계의 양상이다. 이 둘은 서로 섞일 수가 없다. 이은선은 공간과 장소의 경계지점을 건드린다. 공간이면서 장소인 세계, 장소이면서 공간일 수도 있는 희미한 세계, 리미낼리티의 세계를 작품과 사유로 포착하려 한다.


전시전경 ⓒsiwoolee

리미낼리티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사태의 양가적 현상과 대칭적 구조를 분명하고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 빛의 표면은 눈을 부시게 하는 발광체다. 그러나 빛의 이면은 불가시(不可視)의 기하학적인 직선이다. 똑같은 오브제도 장소에 놓였을 때와 공간에 재배치될 때와는 그 양상이 사뭇 달라진다. 장소는 변수적인 운동성을 허용하고 공간은 질서정연한 구성력을 요구한다. 전시공간을 전시장소로 만들기 위해서는, 혹은 전시장소를 전시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장소와 공간을 돌파하는 작가만의 조형적 방안이 요구된다. 리미낼리티라는 경계 혹은 임계(臨界) 지점의 발견은 훌륭한 방안이다. 당분간은 리미낼리티의 이쪽과 저쪽을 관통하는 이은선의 치열한 사유와 작업이 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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